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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 그래 일반적으로 라는 상식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14살 정도 혹은 그 이상의 나이 정도엔 같은 책상, 같은 의자에 앉아 네모난 칠판에 하얀 분필 가루를 날리는 모습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것은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들과 나는 대부분 그 시절에 이런 모습을 경험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6년이 되었을 수도 1달이 되었을 수도 있겠고 혹은 한번도 그런 모습을 격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 시절 나는 정해진 규칙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탈을 꿈꾸기에 충분한 나의 모습이었고 자유라는 이름을 걸고 나는 자꾸 일탈을 꿈꾼다. 편지한장 남기고 틀을 벗어나 보기도 하고 무대라는 곳을 향해 그 갈증을 해소해 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자유를 꿈꾸는 나에게 자유라는 것은 방법이 없었다. 어느날의 편지 한장 처럼 반복되는 하루가 무의미 하여 교실을 벗어나 보기도 하고 교과서와 문제집 보다 잡동사니라는 연극반 활동에 전념하기도 한다.그것은 방법을 찾아나선 나의 모습이 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렀게 원하던 자유를 찾았을까? 생각해보니 정말 내가 원한 것은 자유 였나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유란 어떤 범위이며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황당한 질문도 건네본다. 물을 마셔도 끊임없이 나는 갈증에 나는 끊임 없이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7월의 중순은 다가왔고 반쯤 열어논 창문 넘어로 빗소리가 바닥을 친다. 요즘은 자정을 넘어선 이시간에도 예전처럼 잠에 들 수 없는 내 모습을 장마철 쉴세없이 내리치는 빗소리 때문이라는 그럴 듯한 이유로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20살이 훌쩍 넘어버린 나에게 같은 책상 ,같은 의자 대신 선택이라는 자유가 주어진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하던지 그것은 자유가 된 것이다.하지만 선택의 선택을 거듭한 나는 그 속에서 어떠한 자유도 찾지 못한다. 자유로운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구속 투성이 었으며 네모난 상자에 네모난 문서들이 오고가는 그런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자유로운 선택은 일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박스에 세상이 다가온 것이다. 어린 시절 일탈엔 보호받을 대상이라는 꼬리표가 있었지만 이젠 그 일탈로 인해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것은 꽤 거슬리는 일이다. 자유라는 것은 꽤 귀찮은 녀석인가보다. 자유라는 녀석 때문에 자꾸 어떠한 댓가들이 밀려온다.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시절과 같은 자유를 꿈꾸는 나에겐 꽤 귀찮은 댓가이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렀게 자유를 꿈꾸던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틀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틀을 바꾸는 것 혹은 그 틀안에서 무언가 다른 색을 칠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 그들은 일정 규칙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말장난 같은 그런 말들은 그것들을 합리화 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네모난 책상과 네모난 의자로 그시절을 경험한 그들과 나는 아직도 자유라는 단어를 꿈꾸며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체 가장 깊숙한 감각에 의해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는 시간에 나의 선택에도 변화가 온다. 이젠 나의 선택에 누구를 탓 할 수도 없고 나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네모난 책상과 네모난 의자가 전부라고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오늘 따라 드렁큰 타이거의 신곡도 베토벤 의 월광도 엘라아줌마의 스윙도 존레논의 사랑노래도 두두두둑 바닥을 치는 빗방울만 못하다.지금의 나의 기분을 장마철 시끄러운 빗방울 그리고 그것을 받아내는 바닥만이 알기라도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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